Horror
2026년 1월 13일 · 29 min read

우리 동의 주민들

우리 동의 주민들

나는 이 아파트에 이사 온 지 석 달째다.

처음엔 좋았다. 관리비가 저렴하고, 단지 내 커뮤니티 시설이 잘 되어 있었다. 입주할 때 관리사무소에서 "우리 동은 주민 간 소통이 활발해요"라며 자랑스럽게 말했던 게 기억난다.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일주일 후에 알게 됐다.

첫 번째 이상한 점은 복도였다. 1502호부터 1512호까지, 모든 집 현관문이 똑같은 회색이었다. 페인트 색깔만 같은 게 아니라, 긁힌 자국의 위치, 손때 묻은 부분까지 똑같았다. 처음엔 같은 시공사에서 지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우편함도 똑같았다. 1504호 우편함에 붙어 있던 스티커 자국이, 1508호 우편함에도 정확히 같은 위치에 있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1507호 아주머니가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우편함 얘기를 꺼낸 적이 없는데도.

"여기 살다 보면 익숙해져요. 우리 동 주민들은 다 그래요."

아주머니는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이상했다. 입 모양은 웃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두 번째 이상한 점은 관리사무소의 문자였다.

[15동 주민 여러분께]
오늘 저녁 7시, 동별 회의가 있습니다.
참석은 의무사항입니다.
불참 시 다음 달 관리비가 조정됩니다.

의무? 관리비 조정?

나는 문자를 무시했다. 그런데 저녁 6시 50분, 초인종이 울렸다.

"회의 시간입니다."

문 밖에 1507호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그녀 뒤로 복도에 다른 주민들도 줄지어 서 있었다. 모두 같은 표정이었다. 웃고 있지만, 눈은 웃지 않는.

"저, 바빠서요."

"바쁘시면 안 돼요. 우리 동 주민이시잖아요."

그들은 내가 거절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슬리퍼를 신고 따라갔다.


회의실은 단지 내 커뮤니티 센터 지하에 있었다. 형광등 불빛이 너무 밝아서 눈이 아팠다. 의자들이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벽에는 이상한 문구가 붙어 있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개인보다 공동체."
"기억은 공유됩니다."

주민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모두 20명쯤 됐다. 15층 전체 가구 수와 정확히 일치했다.

관리소장이 앞에 섰다. 5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는데, 얼굴에 이상한 미소가 고정되어 있었다.

"신규 입주자분, 환영합니다. 1510호 주민분이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오늘은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입니다. 우리 동의 규칙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는 칠판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1. 매일 저녁 7시, 복도를 걸으세요.
2. 이웃의 현관문을 확인하세요.
3. 다른 동 주민과 대화하지 마세요.
4. 우리 동의 일은 밖에서 말하지 마세요.
5. 기억하세요. 우리는 하나입니다.

"이게 무슨...?"

"규칙입니다. 우리 동 주민들은 모두 지킵니다."

관리소장이 다가왔다. 그의 눈이 이상하게 반짝였다.

"1510호 주민분도 이제 우리 중 하나예요. 동의하시죠?"

"만약 동의 안 하면요?"

"동의 안 하시는 분은 없었어요. 지난 3년간."

그는 웃었다. 주변 주민들도 함께 웃었다. 똑같은 타이밍에, 똑같은 강도로.

나는 그때 깨달았다. 이들의 웃음소리가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집에 돌아와서 나는 인터넷을 뒤졌다.

15동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부동산 매물 정보, 평면도,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3년 전 지역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이상한 글을 하나 발견했다.

"15동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민들이 밤마다 복도를 배회하고,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관리사무소에 신고했지만 묵살당했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 1506호"

그 글 아래 댓글은 하나뿐이었다.

"해결됐습니다. 더 이상 걱정하지 마세요. - 관리사무소"

1506호.

나는 낮에 그 집 앞을 지나쳤던 게 기억났다. 현관문에 이사 박스들이 쌓여 있었다. 새로 들어온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3년 전 글을 쓴 사람은 어디로 간 걸까?


그날 밤 7시,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또각또각.

일정한 간격의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움직였다. 나는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봤다.

주민들이었다. 1507호 아주머니, 1505호 남자, 1511호 부부. 모두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각 집 현관문을 확인하고 있었다. 문패를 만지고, 문손잡이를 흔들고, 우편함을 열어보는.

그들은 내 집 앞에서 멈췄다.

"1510호."

누군가 속삭였다.

"아직 적응 중."

"시간이 필요해."

"곧 우리처럼 될 거야."

나는 숨을 죽였다. 그들이 내 문을 두드릴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들은 그냥 지나갔다. 다음 집으로, 또 다음 집으로.

발소리가 멀어지고, 복도는 다시 고요해졌다.

나는 그날 밤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 나는 1506호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저 1510호 사는데요. 인사드리려고..."

"아, 네. 반갑습니다."

그녀는 웃었다. 입은 웃는데, 눈은 웃지 않는 그 표정으로.

"여기 산 지 오래되셨어요?"

"한... 3년 정도요?"

나는 숨이 막혔다. 3년 전 그 글을 쓴 사람이 바로 이 여자였다. 분명히.

"혹시 이 동에서 이상한 일 겪으신 적 없으세요?"

"이상한 일이요?"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그 동작이 어색했다. 마치 로봇처럼, 정해진 각도만큼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뇨. 여기 정말 좋아요. 주민들도 친절하고. 우리 동은 특히 더요."

"우리 동은 하나니까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1507호 아주머니였다. 언제 온 건지, 그녀가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맞아요. 하나죠."

1506호 여자도 똑같이 대답했다. 똑같은 억양으로, 똑같은 리듬으로.

나는 뒤로 물러났다.


그날 저녁, 또 문자가 왔다.

[1510호 주민님께]
규칙을 지켜주세요.
오늘 저녁 7시, 복도를 걸어주세요.
현관문을 확인해주세요.
우리는 하나입니다.

나는 문자를 삭제했다. 하지만 1분 후 똑같은 문자가 또 왔다. 삭제해도, 또 왔다. 10번, 20번, 30번.

휴대폰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초인종이 울렸다.

"1510호 주민님."

문 밖에서 관리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규칙을 지키셔야 합니다. 다른 주민분들이 걱정하고 계세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 열어주세요. 우리 얘기 좀 해요."

"싫어요. 나가주세요."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여러 명의 발소리. 점점 가까워지는.

"1510호 주민님."

이번엔 여러 명이 함께 말했다. 완벽하게 일치하는 목소리로.

"우리는 하나입니다."

"당신도 곧 우리가 됩니다."

"문을 여세요."

나는 문에서 멀리 물러나 거실 구석에 웅크렸다. 그들은 한 시간 동안 문 밖에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서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모든 소리가 멈췄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이사를 결심했다.

관리사무소에 해지 신청을 하러 갔다. 하지만 관리소장은 고개를 저었다.

"15동 주민은 이사 갈 수 없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제 돈으로 계약한 건데."

"계약서를 다시 읽어보세요. 특약사항이 있습니다."

그는 서류를 내밀었다. 나는 계약서 마지막 장을 펼쳤다.

거기,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15동 입주자는 동별 규칙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되며, 일방적 해지가 불가능합니다. 단, 동 주민 전체의 동의를 얻을 경우 예외로 합니다."

"이게 무슨..."

"3년 전에도 이사 가려던 분이 있었어요. 1506호 분이요."

관리소장이 웃었다.

"그분도 지금은 잘 지내고 계시죠. 적응하셨어요. 당신도 곧 그렇게 될 겁니다."

나는 서류를 집어던지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경찰서로 갔다. 하지만 경찰은 믿지 않았다.

"주민 간 분쟁은 저희가 개입하기 어렵습니다. 관리사무소와 상의하세요."

"그 사람들이 이상해요! 밤마다 복도를 배회하고, 같은 말을 반복하고..."

"CCTV 확인해보셨어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복도에 CCTV는 없었다. 15동에만 유독 없었다.


그날 밤부터 이상한 일이 시작됐다.

내 현관문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미세한 변화였다. 문손잡이의 각도가 조금 달라지고, 문패의 위치가 살짝 이동했다. 하지만 점점 더 심해졌다.

어느 날은 문 색깔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내 문이 다른 집 문처럼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똑같은 긁힌 자국, 똑같은 손때까지.

나는 페인트를 사서 다시 칠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또 회색이었다.

그리고 우편함에서 이상한 쪽지가 나오기 시작했다.

"곧 당신도 우리가 됩니다."
"저항하지 마세요."
"우리는 하나입니다."

나는 쪽지를 찢어버렸다. 하지만 매일, 새로운 쪽지가 들어왔다.


2주가 지났다.

나는 더 이상 밖에 나가지 않았다. 음식은 새벽에 배달시켜서 받았다. 주민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들은 점점 더 가까이 왔다.

밤마다 내 문 앞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1510호."

"아직도 저항하나."

"곧 끝나."

"우리는 하나가 될 거야."

나는 귀를 막았다. 하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벽을 통해, 바닥을 통해, 천장을 통해 들려왔다.

그리고 어느 날, 거울을 보다가 깨달았다.

내 얼굴이 변하고 있었다.

표정이 굳어가고 있었다. 입은 웃는데, 눈은 웃지 않는. 그들과 똑같은 표정으로.

"아니야. 아니야."

나는 얼굴을 때렸다. 다른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내 얼굴을 조종하는 것 같았다.


한 달이 지났다.

오늘 저녁 7시, 나는 복도를 걷고 있다.

또각또각. 또각또각.

일정한 간격으로 걷는다. 다른 주민들과 똑같은 리듬으로.

각 집 현관문을 확인한다. 문패를 만지고, 문손잡이를 흔든다. 우편함을 연다.

1502호, 1504호, 1506호.

모두 같은 회색 문이다. 같은 긁힌 자국, 같은 손때.

1510호 앞에 멈춘다.

내 집이다. 하지만 이제 다른 집과 구별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내 입에서 말이 나온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옆에서 1507호 아주머니가 웃는다.

"잘 적응하셨네요."

나도 웃는다. 입은 웃는데, 눈은 웃지 않는다.


오늘 새로운 주민이 이사 왔다.

1509호에. 젊은 남자다.

관리소장이 그에게 말한다.

"우리 동은 주민 간 소통이 활발해요."

남자가 웃는다. 아직 진짜 웃음이다. 눈도 함께 웃고 있다.

나는 그를 본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한다.

'곧 당신도 우리가 됩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다르다.

"환영합니다. 우리 동은 정말 좋아요."

나는 웃는다.

입은 웃는데, 눈은 웃지 않는다.


오늘도 저녁 7시가 되면, 나는 복도를 걷는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걸음으로.

1509호 문 앞에서 멈춘다. 안에서 TV 소리가 들린다. 그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라는 것을.

그리고 그도 우리가 될 것이다.

나처럼.

또각또각.

복도를 걷는 발소리가 들린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우리는 계속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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