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rror
2026년 1월 18일 · 26 min read

역행

역행

벽시계를 산 건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였다. 재택근무를 시작하면서 노트북 화면만 보다 보니 시간 감각이 무뎌졌다. 벽에 걸린 아날로그 시계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가장 평범한 디자인을 골랐다. 흰색 원형 케이스, 검은색 숫자, 간단한 세 개의 바늘. 배송은 빨랐다. 이틀 만에 도착했다.

거실 벽에 걸고 건전지를 넣었다.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똑. 똑. 똑. 규칙적인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날 저녁, 업무 보고서를 작성하다가 시계를 봤다. 오후 7시 23분.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몇 분 뒤 또 시계를 확인했다. 7시 22분.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싶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7시 22분. 초침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똑. 똑. 똑.

하지만 방향이 반대였다.

초침이 12에서 11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정확하게.

불량품인가. 시계를 떼어내 뒤집어봤다. 건전지를 빼고 다시 넣었다. 다시 벽에 걸었다. 초침은 정상적으로 12에서 1 쪽으로 움직였다.

안도하며 자리에 앉았다. 노트북 시계는 7시 2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시간 확인차 시계를 봤다. 오전 8시 40분. 괜찮았다. 회의는 9시부터였다.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켰다. 화면 우측 하단의 시계가 8시 35분을 표시했다.

벽시계를 다시 봤다. 8시 38분.

노트북: 8시 35분.
벽시계: 8시 37분.
노트북: 8시 35분.
벽시계: 8시 36분.

또 거꾸로 가고 있었다.

이번엔 확실히 봤다. 초침이 역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분침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시계를 버렸다. 쓰레기봉투에 넣어 밖에 내다놨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47분.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평소 설정한 아침 7시 알람이었다.

하지만 화면은 11시 32분을 표시하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껐다 켰다. 재부팅 후에도 같았다. 11시 31분. 30분. 29분.

시간이 거꾸로 가고 있었다.

다음 날, 은행 앱에 접속했다. 로그인 화면에 내 생년월일을 입력하려는데 손이 멈췄다.

생년월일이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여러 개가 떠올랐다. 1990년생? 1991년생? 1989년생?

주민등록증을 꺼냈다. 앞자리 숫자를 봤다.

그런데 어제 봤을 때는 900615였던 것 같았다.

확신할 수 없었다.

회사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다. "건강검진 대상자 명단 확인 부탁드립니다. 올해 30세 이상이시죠?"

"네... 아니, 잠깐만요."

나는 올해 몇 살인가.

계산을 시도했다. 2025년에서 1991년을 빼면... 아니, 1990년?

손가락으로 세어봤다. 34? 33? 35?

"고객님?"

"죄송합니다. 다시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거울을 봤다. 내 얼굴이 낯설었다. 이 주름은 언제 생긴 거지? 아니, 어제는 이보다 더 깊었던 것 같은데.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나 몇 살이야?"

"갑자기 왜? 33이잖아."

"확실해?"

"...너 괜찮아?"

끊었다. 다른 친구에게 다시 물었다. "내가 몇 살이더라?"

"34 아니었어? 아니 잠깐, 32?"

모두가 헷갈려했다.

그날 밤부터 달력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핸드폰 달력 앱을 열면 오늘 날짜가 계속 바뀌었다. 1월 18일. 1월 17일. 1월 16일.

날짜를 외우려 했다. "오늘은 1월 15일. 1월 15일."

1분 뒤 확인하면 1월 14일이었다.

메모를 남겼다. "오늘은 1월 13일 목요일"

다음 날 메모를 보면 "오늘은 1월 8일 화요일"로 바뀌어 있었다. 내 글씨체로.

회사에서 프로젝트 마감일을 물었다. "1월 말까지입니다."

"구체적으로 며칠?"

대답할 수 없었다. 1월이 며칠까지 있는지 몰랐다. 31일? 30일? 28일?

달력을 봐도 숫자가 흐릿했다. 20일 이후의 날짜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25일쯤 되는 칸은 아예 비어 있었다.

주민센터에 갔다. "주민등록등본 발급 부탁드립니다."

직원이 내 신분증을 스캔했다. "고객님, 생년월일 확인 부탁드립니다."

"19...91년 6월 15일입니다."

직원이 화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는 92년으로 나오는데요."

"아니, 91년이 맞는데..."

"신분증에도 92라고..."

내 손의 주민등록증을 봤다. 920615.

분명 아까는 91이었다.

"잠시만요." 직원이 뭔가를 입력했다. "시스템이 좀 이상하네요. 계속 숫자가... 고객님, 혹시 최근에 개명이나 정정 신청 하신 적 있으세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력이 계속 변경되고 있어요. 93년, 94년... 이건 뭐지."

나는 센터를 나왔다.

집에 돌아와 거울을 봤다. 얼굴이 더 어려 보였다. 주름이 얕아졌다.

아니, 어제보다 더 늙어 보였나?

기억이 확실하지 않았다.

서랍에서 옛날 사진들을 꺼냈다. 대학 졸업사진. 사진 속 내 얼굴을 봤다.

그게 나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사진 뒷면의 날짜를 확인했다. 2015.03.15.

숫자가 흐려지더니 2016.03.15로 바뀌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2017.03.15.

사진을 던졌다.

핸드폰을 켰다. 상단의 날짜를 봤다.

12월 28일.

1월이 사라졌다.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 가장 최근 통화가 12월 30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건 분명 어제 한 통화였다.

문자함을 열었다. 메시지 날짜들이 모두 12월이었다. 1월 1일 이후의 메시지가 없었다.

아니, 있었던 것 같은데 사라졌다.

은행 앱을 열었다. 거래 내역 최근 날짜가 12월 25일이었다.

"이상합니다. 분명 이번 주에도 결제를..."

고객센터에 전화했다. "1월 거래내역 조회가 안 되는데요."

"고객님, 오늘이 12월 27일인데요."

"아니, 1월..."

"2024년 12월 27일입니다."

끊었다. 다른 은행에 전화했다. 같은 대답이었다.

모든 곳에서 12월이었다.

창밖을 봤다. 거리의 전광판.

"2024.12.26 목요일"

눈을 감았다 떴다.

"2024.12.24 화요일"

사람들은 평소처럼 걸어다녔다. 아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며칠이 지났다. 아니, 며칠이 지난 건지 알 수 없었다.

핸드폰 날짜는 12월 15일을 가리켰다.

뉴스를 틀었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크리스마스가 지났던 것 같은데.

아니, 아직 안 온 건가.

기억이 뒤섞였다.

주민등록증을 다시 꺼냈다.

생년월일: 950615

나는 1995년생이 된 건가. 그럼 올해 나이는...

계산할 수 없었다. 올해가 몇 년인지 몰랐다.

거울의 내 얼굴은 20대처럼 보였다. 아니, 10대? 30대?

판단할 수 없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아들, 생일 축하해."

"...생일이요?"

"6월 15일이잖아. 잊었어?"

"지금 12월인데요."

"무슨 소리야. 6월이지."

통화를 끊고 창밖을 봤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니, 벚꽃이 날리고 있었다.

아니, 낙엽이.

아니.

핸드폰 화면: 날짜 없음.

달력 앱을 열었다. 모든 날짜 칸이 비어 있었다.

설정에서 날짜를 수동으로 입력하려 했다. 키보드에 숫자를 쳤다.

2025.01.18

엔터를 누르는 순간 숫자가 지워졌다.

다시 입력했다. 지워졌다.

모든 앱에서, 모든 기기에서, 날짜가 표시되지 않았다.

신분증의 생년월일 숫자가 흐려졌다. 97... 98... 99... 00...

거울을 봤다. 내 얼굴이 점점 어려지고 있었다. 아니, 늙어가고 있었다.

아니, 변화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누군지 몰랐다.

며칠째, 아니 몇 주째, 아니 몇 개월째.

시간의 단위를 잃었다.

밖에 나가려 했다. 현관문을 열었다.

복도에 달력이 붙어 있었다.

모든 날짜 칸이 비어 있었다.

이웃집 문패를 봤다. "301호 김○○ (생년월일: )"

괄호 안이 비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버튼을 눌렀다. 1층.

문이 열렸다. 복도였다. 내 집 앞 복도.

다시 1층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같은 복도.

계단으로 내려갔다. 한 층, 두 층, 세 층.

내 집 앞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거실 벽에 시계가 걸려 있었다.

분명 버렸는데.

초침이 거꾸로 돌고 있었다. 분침도, 시침도.

12시에서 11시로. 11시에서 10시로.

숫자가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12가 지워졌다. 11이 지워졌다. 10이.

시계판이 백지가 되었다.

바늘만 돌고 있었다.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은 채.

핸드폰을 켰다. 화면이 켜지지 않았다.

노트북을 켰다. 부팅되지 않았다.

TV를 켰다. 모든 채널이 "방송 시간 외" 메시지를 표시했다.

시간 외.

창밖을 봤다.

거리가 텅 비어 있었다. 차도, 사람도 없었다.

하늘에 해가 없었다. 달도 없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회색빛이었다.

시간이 멈춘 게 아니었다.

시간이 사라진 것이었다.

나는 거울을 봤다.

반사된 내 얼굴에 주름이 없었다.

윤곽도 흐릿했다.

눈, 코, 입의 위치가 확실하지 않았다.

나이를 특정할 수 없는 얼굴.

아니, 얼굴이라고 부를 수 없는 무언가.

핸드폰을 다시 켰다. 이번엔 켜졌다.

상단 표시: "-- . -- . --"

설정을 열었다.

생년월일 입력란: "----. --. --"

이름: ""

주민등록번호: "------"

나는 누구인가.

언제 태어났는가.

오늘은 언제인가.

대답할 수 없었다.

벽시계의 바늘이 멈췄다.

숫자 없는 시계판 위에서.

가리킬 것이 없어진 바늘.

똑딱거리는 소리가 멈췄다.

완벽한 침묵.

나는 의자에 앉았다.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어디를 가도 같은 곳이었다.

언제를 기다려도 시간이 오지 않았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메시지: "내일 회의 참석 부탁드립니다."

발신자: (없음)

날짜: (없음)

시간: (없음)

내일이 언제인지 몰랐다.

오늘이 언제인지도.

어제가 있었는지도.

창밖의 회색빛이 계속되었다.

밤이 오지 않았다.

아침도 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에서.

나는 기다렸다.

무엇을.

언제까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도, 벽시계의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꾸로.

💬 Comments powered by Gis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