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저 우산을 펼쳤을 뿐이다.
퇴근길이었다. 평소와 같은 골목이었다. 아파트 단지로 가는 지름길. 5년째 같은 길을 걸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골목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빗물에 젖은 아스팔트가 평소보다 어두웠고, 가로등 불빛이 이상하게 흔들렸다.
그때 내 그림자를 봤다.
가로등 아래, 바닥에 드리운 내 그림자가 내 발보다 먼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비에 젖은 지면이 울퉁불퉁해서 그림자가 왜곡된 것뿐이라고. 하지만 다시 보니 분명했다. 내가 왼쪽으로 걸으려 할 때, 그림자는 이미 오른쪽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멈춰 섰다. 그림자도 멈췄다. 정확히 내 발밑에 있었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엔 그림자를 주시하면서. 처음 몇 걸음은 정상이었다. 그런데 골목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그림자가 먼저 모퉁이를 돌았다. 0.5초 정도.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확실했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나는 제자리에 서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지도 앱을 켰다. GPS가 내 위치를 찾는 데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 화면의 파란 점이 이리저리 떠다니다가, 결국 "위치를 찾을 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떴다.
이상했다. 이 골목은 5년 동안 매일 지나다녔다. 그런데 지도에는 회색 빈 공간만 있었다. 건물 윤곽선도, 도로 표시도 없었다.
비는 더 세차게 내렸다. 우산을 쓰고 있었지만 옷이 젖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차 소리도, 사람 소리도.
앞으로 가야 할지, 뒤로 돌아가야 할지 결정하려던 순간이었다.
내 그림자가 움직였다.
나는 서 있었는데, 그림자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며 골목 안쪽을 향했다. 마치 손짓하듯이.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림자는 그대로였다. 내 발밑이 아니라, 3미터쯤 앞에 있었다.
숨이 막혔다.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왔던 길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골목이 달라져 있었다. 분명 직선이었던 길이 구불구불했고, 있어야 할 편의점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낡은 철문들이 늘어선 좁은 통로만 있었다.
멈춰 섰다. 숨을 고르려고 했다. 그때 발밑을 봤다.
그림자가 없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서 있는데, 내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우산, 가방, 내 몸. 모든 게 그림자를 만들어야 하는데 바닥은 텅 비어 있었다.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앞을 봤다. 골목 저 끝,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 내 그림자가 서 있었다. 똑바로 서서,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림자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한 걸음 뒤로 가면, 그림자도 한 걸음 앞으로 왔다.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항상 같은 간격을 유지했다.
나는 달렸다. 무작정 달렸다. 골목을 벗어나려고, 큰길로 나가려고. 하지만 골목은 끝나지 않았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또 다른 골목이 나타났다. 모두 같은 풍경이었다. 낡은 벽, 녹슨 철문, 깨진 가로등.
그리고 매번, 저 앞에 내 그림자가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골목 한가운데 주저앉았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비는 멈추지 않았고, 온몸이 흠뻑 젖었다. 우산은 언제 떨어뜨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림자가 다가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번엔 내가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다가왔다. 가로등에서 가로등으로, 빛에서 빛으로 건너오며 점점 가까워졌다.
3미터. 2미터. 1미터.
마침내 내 발밑에 도착했다.
그림자가 내 발과 겹쳐졌다.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뭔가 들어왔다는 걸. 경계가 무너졌다는 걸.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골목 끝에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큰길인 것 같았다. 그쪽으로 뛰었다. 불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거의 다 왔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그런데 불빛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나였다.
정확히 나와 똑같은 사람이 불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같은 옷, 같은 가방, 같은 자세. 그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봤다.
내 얼굴이었다. 하지만 표정이 달랐다. 그 사람은 웃고 있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람이 한 걸음 다가왔다. 입을 열었다.
"이제 내 차례야."
그 목소리는 내 목소리였다.
그날 이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처럼 문을 열고, 평소처럼 씻고, 평소처럼 잠들었다. 다음 날 출근했고, 동료들과 이야기했고, 저녁에 퇴근했다.
모든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가끔, 거울을 볼 때마다 이상한 느낌이 든다. 거울 속 내가 0.5초 늦게 움직이는 것 같다. 내가 손을 들면, 거울 속 나는 잠깐 멈칫하다가 따라 한다.
그리고 어제, 퇴근길에 또 그 골목을 지나갔다.
비가 내렸다.
내 그림자를 봤다. 이번엔 그림자가 내 뒤에 있었다.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계속 걸었다.
오늘도 비가 내린다. 퇴근 시간이 다가온다. 나는 또 그 골목을 지나갈 것이다.
그림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매일, 조금씩 더 가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