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집
나는 할머니 집에 혼자 가본 적이 없었다.
서울에서 차로 네 시간. 산골 마을 끝자락, 비포장도로를 한참 들어가야 나오는 그곳. 어렸을 때는 항상 부모님과 함께 갔고, 대학 들어간 뒤로는 아예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가 넘어지셨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부모님은 해외 출장 중이었다.
"괜찮아. 며칠만 있다 올게."
나는 할머니께 전화로 그렇게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그래, 조심해서 와라" 하시며 전화를 끊으셨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느렸다.
금요일 오후, 나는 렌터카를 몰고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네비게이션은 마을 입구까지만 안내했다. 그 뒤로는 기억에 의존해야 했다. 좁은 시멘트 길을 지나 흙길로 접어들자, 차창 밖으로 폐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너진 지붕, 깨진 창문, 덩굴에 뒤덮인 담장. 이 마을에 사람이 남아있기는 한 걸까.
할머니 집은 마을 제일 안쪽에 있었다. 낡은 기와집. 마당에는 장독대와 우물이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고요함이 귀를 눌렀다. 새소리도, 바람 소리도 없었다.
"할머니!"
나는 대문을 밀고 들어가며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마루에 신발을 벗어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열려 있었고, 할머니는 이불을 덮고 누워 계셨다.
"할머니, 저 왔어요."
할머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핏기 없이 창백했다.
"...왔구나."
"많이 아프세요?"
"괜찮다. 그냥 좀 삐끗했을 뿐이야."
할머니는 일어나려 하셨지만, 내가 말렸다. 저녁은 내가 챙기겠다고 했다.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는데, 안에는 김치와 된장, 몇 가지 반찬만 있었다. 쌀독을 열어보니 쌀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저녁을 차려 할머니께 드렸다. 할머니는 몇 숟가락 뜨시더니 숟가락을 놓으셨다.
"할머니, 더 드셔야죠."
"배가 안 고프다. 넌 먹어라."
나는 혼자 밥을 먹었다. 할머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계셨다. 그 시선이 왠지 불편했다. 마치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게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밤이 되었다. 할머니는 안방에서, 나는 건넛방에서 자기로 했다. 이불을 펴고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집이 너무 조용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계속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가 마찰하는 소리 같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할머니가 화장실에 가시나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발소리는 화장실이 아니라 마루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멈췄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가만히 있었다. 발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엔 내 방문 앞에서 멈췄다. 문틈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할머니가 촛불을 들고 계신 것 같았다.
"할머니...?"
대답이 없었다. 문 앞에서 숨소리만 들렸다. 거칠고 느린 숨소리. 나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발소리가 다시 멀어졌다. 마루를 지나, 마당으로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이불에서 나와 창문으로 다가갔다. 커튼을 살짝 열고 밖을 내다봤다.
마당에 할머니가 서 계셨다. 흰 옷을 입고, 우물 앞에. 할머니는 우물을 들여다보고 계셨다. 등이 굽은 채로, 오랫동안.
나는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안방 문이 열려 있었다. 안을 들여다봤다.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그럼 마당에 있는 건...?
나는 다시 창문으로 갔다. 마당은 텅 비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침상을 차리고 계셨다.
"할머니, 다리 괜찮으세요?"
"응, 좀 나아졌다."
"어젯밤에... 마당에 나가신 적 있으세요?"
할머니가 나를 쳐다봤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아니."
"제가 창문으로 봤는데..."
"네가 잘못 본 거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나는 더 묻지 못했다.
아침을 먹고 나서 나는 마을을 돌아보기로 했다. 할머니는 말리지 않으셨다. "조심해라" 하고만 말씀하셨다.
마을은 거의 폐허였다. 집들은 대부분 비어 있었고, 몇 채는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골목을 걷다가 오래된 우물을 발견했다. 뚜껑도 없이 그냥 열려 있는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물은 없고, 어둠만 가득했다.
"거기 들여다보지 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할머니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마른 몸에 헝클어진 머리.
"왜요?"
"옛날에 사람이 빠져 죽었어. 그 뒤로 이상한 일이 많이 생겼지."
"무슨 일이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 갔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려 했지만, 여자는 골목 모퉁이를 돌자마자 사라졌다.
할머니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계셨다. 다리가 아프다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멀쩡히 움직이고 계셨다.
"할머니, 다리 괜찮으세요?"
"응, 나았어."
하지만 할머니의 움직임은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관절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뚝뚝 끊기는 동작이었다.
그날 저녁, 할머니는 저녁을 거의 드시지 않으셨다. 그리고 계속 창밖을 바라보셨다. 마당 쪽을. 우물 쪽을.
"할머니, 무슨 걱정 있으세요?"
"...아니다."
"말씀하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할머니가 나를 돌아보셨다. 그 눈빛이 이상했다. 공허하고, 깊고, 차가웠다.
"넌 모르는 게 나아."
밤이 되었다. 나는 이번엔 방문을 잠그고 잤다. 하지만 새벽 두 시쯤, 또 발소리가 들렸다. 복도를 지나, 마루로, 마당으로. 나는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봤다.
할머니가 또 우물 앞에 서 계셨다. 이번에는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우물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계셨다. 두레박을 돌리고 계셨다. 위로, 위로, 천천히.
두레박이 올라왔다.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물이 아니었다. 검은색, 축축하게 흘러내리는 무언가. 할머니는 그것을 바가지로 떠서 마셨다.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입을 손으로 막았다.
할머니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 쪽을 쳐다봤다. 2층 창문을. 나를.
나는 뒤로 물러났다. 커튼을 닫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침이 되었다. 할머니는 또 아무 일 없다는 듯 아침을 차리고 계셨다. 하지만 입술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할머니..."
"밥 먹어라."
나는 밥을 먹을 수 없었다. 할머니가 차려준 음식을 볼 수 없었다. 할머니는 내가 먹지 않는 걸 보고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냥 가만히 앉아 계셨다.
"할머니, 저 서울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그래."
"할머니도 같이 가시죠. 병원에 가보셔야 해요."
"난 여기 있을 거다."
"하지만..."
"넌 가라. 지금 당장."
할머니의 목소리가 달랐다. 낮고, 무겁고, 여러 겹으로 겹쳐진 것 같았다.
나는 짐을 쌌다. 할머니는 대문까지 나를 배웅하지 않으셨다. 나는 차에 타서 시동을 걸었다. 백미러로 집을 보니, 할머니가 마당에 서 계셨다. 우물 옆에.
나는 액셀을 밟았다. 비포장도로를 달려 마을을 빠져나왔다. 시멘트 길로 접어들었을 때, 뒤를 돌아봤다. 마을은 안개에 잠겨 있었다. 낮인데도.
서울로 돌아온 뒤, 나는 부모님께 전화했다. 할머니 상태를 말씀드렸다. 부모님은 걱정하시며 빨리 돌아오겠다고 하셨다.
일주일이 지났다. 부모님이 할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오셨다. 할머니는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셨다. 의사는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계속 "집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엄마, 여기서 좀 쉬시다 가세요."
"안 돼. 난 집에 있어야 해."
"왜요?"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으셨다.
결국 할머니는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셨다. 혼자.
한 달이 지났다. 부모님이 할머니께 전화하셨는데,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이틀 동안 계속 전화했지만 소용없었다. 부모님은 걱정이 되셔서 경찰에 신고하셨다. 경찰이 그 집에 갔다.
할머니는 우물에서 발견되셨다.
장례를 치르고, 집을 정리하러 갔다. 부모님과 나, 셋이서. 집은 텅 비어 있었다. 할머니의 흔적들만 남아 있었다.
우물 뚜껑은 열려 있었다. 나는 안을 들여다봤다. 깊고 어두웠다. 그리고 바닥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거기서 뭐 하니."
엄마가 불렀다. 나는 우물에서 떨어졌다.
집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날 밤부터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다가 목이 말라 일어나면, 컵에 물이 아닌 검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거울을 보면, 내 뒤에 누군가 서 있는 것 같았다. 굽은 등, 흰 옷.
그리고 매일 밤 두 시, 나는 우물을 꿈꾼다. 깊은 우물 안에서, 할머니가 나를 올려다보고 계신다. 손을 뻗으며, "내려와라" 하고 속삭이신다.
어제 밤, 나는 또 그 꿈을 꿨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내 손에 흙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입안에서 우물물 냄새가 났다.
오늘 아침, 거울을 봤다. 내 입술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목이 마르다. 너무 마르다. 부엌으로 가야 할 것 같다. 두레박을 돌려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