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rror
2026년 2월 2일 · 23 min read

404호의 규칙

404호의 규칙

나는 이 아파트에 입주한 지 석 달째다.

처음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서울 한복판, 역세권, 그것도 신축 아파트에 이 가격이라니. 부동산 중개인은 "공공임대 물량이라 저렴한 거예요"라고 했고, 나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입주 첫날, 우편함에 A4 용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입주민 생활수칙]
1. 복도에서는 걷는 소리를 최소화할 것
2. 22시 이후 샤워는 15분 이내로 제한
3. 음식물 쓰레기는 반드시 지정 시간에 배출
4. 이웃과 마주치면 먼저 인사할 것
5. 창문은 환기 시에도 30분 이상 열어두지 말 것

아래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 수칙 위반 시 관리사무소에 자동 보고되며, 3회 누적 시 퇴거 조치될 수 있습니다."

좀 까다롭긴 했지만, 집값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문제는 일주일 후 시작됐다.

퇴근 후 현관문을 열려는데, 복도 끝에서 누군가 서 있었다. 401호 앞쯤. 가로등 불빛에 실루엣만 보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불분명했다.

나는 어색하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수칙 4번. 먼저 인사할 것.

그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 사람은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항상 같은 시간, 오후 7시 반쯤. 내가 퇴근해서 집에 들어갈 때.

열흘째 되던 날, 용기를 내서 물었다.

"저기...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대답은 없었다.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한 달쯤 지났을 때, 우편함에 또 종이가 들어왔다.

[404호 거주자 귀하]
생활수칙 위반 내역:
- 10월 17일 23:14, 샤워 시간 22분 (수칙 2번 위반)
- 10월 19일 08:35, 복도 보행 소음 45dB (수칙 1번 위반)
누적 위반: 2회

나는 손이 떨렸다. 샤워 시간을 어떻게 알지? 복도 소음은 또 어떻게 측정한 거지?

관리사무소에 전화했다.

"저, 404호인데요. 이 위반 통지서가—"

"네, 확인했습니다." 상담원의 목소리는 기계적이었다. "각 세대에 생활패턴 모니터링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입주 계약서 14조 3항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 거 동의한 적 없는데요."

"계약서에 서명하셨습니다. 추가 위반 시 퇴거 조치되오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전화는 끊겼다.

나는 계약서를 다시 꺼내 읽었다. 14조 3항. 정말로 있었다. 3포인트 크기의 회색 글씨로, 읽을 수 없을 만큼 작게.

"입주민은 공동체 질서 유지를 위한 생활패턴 모니터링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됨."


그날 밤부터 나는 모든 행동을 의식하게 됐다.

복도를 걸을 땐 발끝으로만 걸었다. 샤워는 타이머를 맞춰놓고 했다. 음식물 쓰레기는 정확히 오전 8시에 버렸다. 창문은 딱 25분만 열어뒀다.

하지만 통지서는 계속 왔다.

- 11월 2일 02:47, 화장실 물 내림 소음 (수칙 1번 위반)
- 11월 5일 19:23, 이웃과 마주쳤으나 인사 지연 1.3초 (수칙 4번 위반)

인사 지연 1.3초?

나는 복도에 카메라가 있는지 찾아봤다. 없었다. 아니, 보이지 않았다. 천장, 벽, 조명 커버 안. 어디에든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여전히 복도 끝에 서 있었다.

매일 밤 7시 반.

정확히 내가 집에 들어올 때.


누적 위반이 세 번째가 됐을 때, 나는 관리사무소로 직접 찾아갔다.

1층 로비 한쪽 구석, 작은 문 안쪽이었다. 노크를 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렸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책상 위에 모니터 여러 대가 놓여 있었다. 화면마다 복도, 엘리베이터, 각 세대 현관 앞 모습이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내 집 앞이었다.

화면 속에서, 누군가 내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지금.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뛰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도착했을 때, 복도는 비어 있었다.

404호 문 앞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현관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

그때, 손잡이가 반대편에서 천천히 돌아갔다.

나는 얼어붙었다.

손잡이는 계속 돌아갔다. 아주 천천히. 누군가 안에서 열려고 하는 것처럼.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손잡이만 돌아갈 뿐,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손잡이는 멈췄다.

10초쯤 지났을까. 손잡이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집 안은 비어 있었다.

모든 게 내가 나갈 때 그대로였다.

하지만 현관 타일 바닥에, 발자국이 있었다.

내 것이 아니었다.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새벽 3시쯤, 현관문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

아주 천천히.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숨을 죽였다.

손잡이는 계속 돌아갔다. 멈추지 않았다. 한 바퀴, 두 바퀴.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침까지 그 소리는 계속됐다.


다음 날, 우편함에 마지막 통지서가 들어왔다.

[404호 거주자 귀하]
누적 위반 3회 도달
금일 18시까지 퇴거 조치
불응 시 강제 집행

나는 이사짐센터에 전화했다. 오늘 당장 옮길 수 있냐고 물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그 아파트는 저희가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에요."

"무슨 소리예요?"

"계약상 문제가 있대요. 다른 데 알아보세요."

세 군데 더 전화했다. 대답은 똑같았다.

나는 혼자 짐을 쌌다. 캐리어 두 개에 최소한만 챙겼다.

오후 5시, 나는 집을 나섰다.

복도 끝에 그 사람이 서 있었다.

이번엔 가까이 있었다. 402호 앞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일정한 간격으로.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뛰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타했다.

문이 열렸다. 나는 뛰어들어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 사람이 보였다.

바로 내 앞에 서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윤곽만.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1층 로비로 내려왔을 때, 관리사무소 문이 열려 있었다.

안에서 누군가 나왔다.

나였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캐리어를 끌고.

그 '나'는 나를 보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4층 버튼을 눌렀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엘리베이터 숫자판을 봤다.

1층, 2층, 3층, 4층.

멈췄다.

그리고 다시 내려오기 시작했다.

4층, 3층, 2층, 1층.

문이 열렸다.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아파트 밖으로 나왔다.

정문을 나서려는데, 경비원이 막았다.

"404호 맞으시죠?"

"네, 근데—"

"퇴거 조치 대상자는 외부 반출이 제한됩니다. 돌아가세요."

"무슨 소리예요? 나 지금 나가는 거예요!"

"안 됩니다."

경비원의 눈빛은 공허했다.

나는 그를 밀치고 뛰었다.

정문을 빠져나갔다.

도로로, 사람들 사이로.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았다.

나는 지하철역으로 뛰었다.

개찰구를 통과하고, 플랫폼에 내려가고, 전동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혔다.

나는 숨을 고르며 창밖을 봤다.

플랫폼에 누군가 서 있었다.

복도 끝에 서 있던 그 사람.

전동차가 출발했다. 그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친구 집에 며칠 얹혀 지냈다.

새 집을 알아봤다. 다른 구, 다른 동네, 전혀 다른 곳.

일주일 후, 나는 새 원룸으로 이사했다.

오래된 빌라였지만, 괜찮았다. 모니터링도 없고, 수칙도 없고.

첫날 밤, 나는 오랜만에 편히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우편함을 확인했다.

A4 용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입주민 생활수칙]
1. 복도에서는 걷는 소리를 최소화할 것
2. 22시 이후 샤워는 15분 이내로 제한
3. 음식물 쓰레기는 반드시 지정 시간에 배출
4. 이웃과 마주치면 먼저 인사할 것
5. 창문은 환기 시에도 30분 이상 열어두지 말 것

아래 작은 글씨.

"위 수칙 위반 시 관리사무소에 자동 보고되며, 3회 누적 시 퇴거 조치될 수 있습니다."

나는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집주인에게 전화했다. 받지 않았다.

부동산에 전화했다. 이미 계약 완료됐다고 했다.

나는 집 밖으로 나갔다.

복도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


지금은 한 달째다.

매일 저녁 7시 반, 그 사람은 복도 끝에 서 있다.

통지서는 벌써 두 번 왔다.

샤워 시간 초과. 복도 소음.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어차피 소용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어제 밤, 현관 손잡이가 다시 천천히 돌아갔다.

나는 문 앞에 앉아서 그 소리를 들었다.

손잡이는 계속 돌아간다.

문은 열리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열릴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반대편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안다.

오늘도 손잡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이 글을 쓴다.

곧 세 번째 통지서가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

손잡이는 지금도 천천히 돌아가고 있다.

💬 Comments powered by Gis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