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
TV를 끈 건 분명 나였다.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렀고, 화면이 깜빡이며 꺼지는 걸 봤다. 늦은 밤 뉴스가 끝나고, 이제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검은 화면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아파트 거실은 어두웠다. 창밖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들어왔다. 꺼진 TV 화면은 거울처럼 방 안을 반사했다. 소파에 앉은 내 윤곽이 흐릿하게 비쳤다.
그리고 그 모습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를 향해.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뛰었다. 손에 쥔 리모컨이 바닥에 떨어졌다. 둔탁한 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화면 속 그림자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정면을 향한 채로.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리모컨을 주웠다. 다시 화면을 봤다. 이번엔 평범했다.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든 내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내가 움직이면 그것도 똑같이 움직였다.
착각이었을까.
나는 전등 스위치를 켰다. 환한 불빛 아래에서 TV는 그저 검은 사각형이었다. 화면에 먼지가 조금 쌓여 있었다. 나는 티슈로 닦았다. 손때가 묻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피곤해서 그래."
혼잣말을 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어젯밤 일이 자꾸 떠올랐다.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는데, 문득 거울 속 내 얼굴을 유심히 봤다.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눈을 깜빡이면 거울 속 나도 깜빡였다. 손을 들면 똑같이 손을 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회사에서는 별일 없었다. 기획안을 수정하고, 회의에 참석하고, 점심을 먹었다. 동료 김 대리가 "요즘 피곤해 보이네요"라고 했다. 나는 "요즘 잠을 잘 못 자서"라고 대답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어두웠다. 현관문을 열고 불을 켰다. 거실이 환해졌다. TV는 그대로였다. 소파도, 테이블도, 모든 게 아침에 나갔을 때와 똑같았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TV를 켰다. 예능 프로그램이 나왔다. 출연자들이 웃고 떠들었다. 소리가 거실을 채웠다. 나는 소파에 기대 화면을 봤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프로그램이 끝나고 광고가 나왔다. 나는 리모컨을 들어 전원을 껐다.
화면이 꺼졌다.
검은 화면에 내 모습이 비쳤다.
이번엔 확실히 봤다.
화면 속 나는 고개를 천천히 왼쪽으로 돌렸다. 창문 쪽을 보는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정면을 향한 채 앉아 있었다.
화면 속 그 모습은 몇 초간 창문 쪽을 보다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면을 봤다. 나를 봤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TV에 다가가 화면을 만졌다. 차가운 유리였다. 내 손바닥 자국이 희미하게 남았다. 화면 속엔 이제 TV 가까이 선 내 모습이 비쳤다. 손을 뻗은 채로.
나는 뒤로 물러났다.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화면을 계속 봤다. 이번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어두운 거실이 반사될 뿐이었다.
핸드폰을 꺼내 검색했다. 'TV 화면 반사 착시', 'TV 화면 잔상', '꺼진 TV 이상 현상'. 별다른 정보는 없었다. 누군가 비슷한 경험을 올린 글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TV 플러그를 뽑았다. 완전히 전원을 차단했다. 그리고 TV에 담요를 덮었다. 화면이 보이지 않게.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주말이 되었다. 토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거실로 나가니 TV에 덮어둔 담요가 그대로였다. 나는 담요를 걷어냈다. 플러그는 여전히 뽑혀 있었다.
낮 동안은 괜찮았다.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밀린 드라마를 노트북으로 봤다. TV는 쓰지 않았다. 그냥 거기 있을 뿐이었다.
저녁이 되자 또 불안해졌다. 나는 TV 앞에 섰다. 플러그를 꽂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결국 꽂지 않았다. 대신 침실로 가서 책을 읽었다.
밤 11시쯤,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왔다. 불을 켜지 않았다. 창밖 가로등 불빛만으로도 충분했다. 부엌에서 물을 마시는데, 거실 쪽에서 뭔가 느껴졌다.
시선 같은 것.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TV가 보였다. 플러그가 뽑힌 채로, 검은 화면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화면에 뭔가 비쳤다.
내가 아니었다.
아니, 나였지만 다른 모습이었다. 화면 속 사람은 부엌이 아니라 소파에 앉아 있었다. TV를 보고 있는 자세로.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정면으로.
나는 손에 쥔 컵을 떨어뜨렸다. 물이 바닥에 쏟아졌다. 유리 깨지는 소리는 없었다. 플라스틱 컵이었으니까.
화면 속 모습은 사라졌다. 이제 그냥 검은 화면이었다. 어두운 거실만 희미하게 반사되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불을 켰다. 거실을 비췄다. TV, 소파, 테이블. 모든 게 평범했다. 아무도 없었다.
일요일 아침, 나는 결심했다. TV를 버리기로.
크지 않은 TV였다. 32인치. 혼자 들 수 있었다. 나는 TV를 들어 현관으로 옮겼다. 복도에 내놓으려고.
그런데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TV 화면에 또 뭔가 비쳤다.
복도가 아니었다.
거실이었다.
화면 속에는 TV가 없는 거실이 보였다. TV가 있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빈 공간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나였다.
화면 속 나는 가만히 서서 빈 공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화면 밖을 봤다. 실제 나를 봤다.
나는 TV를 놓쳐버렸다. 쿵 소리와 함께 TV가 바닥에 떨어졌다. 화면이 깨질 줄 알았는데 멀쩡했다. 검은 화면만 조용히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현관문을 닫았다. TV를 다시 들어 거실로 옮겼다. 원래 자리에 놓았다. 플러그를 꽂았다.
리모컨으로 전원을 켰다.
화면에 뉴스가 나왔다. 아나운서가 주말 날씨를 전했다. 평범한 일요일 아침 방송이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화면을 봤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월요일, 회사에 갔다. 업무를 했다. 점심을 먹었다. 회의를 했다. 모든 게 평소와 같았다.
하지만 자꾸 화장실 거울을 확인하게 됐다. 거울 속 내가 다르게 움직이진 않는지. 사무실 창문에 비친 내 모습도 신경 쓰였다. 컴퓨터 모니터를 끌 때마다 검은 화면에 비친 얼굴을 봤다.
전부 똑같았다. 내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였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거실에서 소리가 들렸다.
TV 소리였다.
나는 분명 TV를 끄고 나갔다. 아침에 뉴스를 보다가 끄고 출근했다.
거실로 들어갔다. TV가 켜져 있었다. 화면에는 예능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출연자들이 웃고 떠들었다. 소파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화면이 꺼졌다.
그리고 화면 속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소파에.
나였다.
화면 속 나는 리모컨을 든 채 TV를 보고 있었다.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하는 것처럼.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입 모양이 보였다.
"왜 나를 보고 있어?"
나는 뒤로 물러났다. 현관 쪽으로. 시선은 TV에서 떼지 못했다.
화면 속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TV에 다가왔다. 화면 가까이. 얼굴이 크게 비쳤다. 눈, 코, 입. 내 얼굴이었다. 하지만 표정이 달랐다. 뭔가 텅 빈 것처럼 보였다.
화면 속 나는 손을 들어 화면을 만졌다. 안쪽에서.
마치 유리창 너머를 더듬는 것처럼.
나는 소리쳤다.
"뭐야!"
대답은 없었다. 화면 속 나는 그저 화면을 계속 만졌다. 손바닥을 눌렀다. 마치 나오려는 것처럼.
나는 TV 플러그를 뽑았다.
화면이 완전히 꺼졌다.
검은 화면에는 이제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너무 어두워서 반사도 제대로 안 됐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바닥에. 숨이 가빠졌다. 손이 떨렸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그날 밤,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침실 창문에 커튼을 쳤다. 거울은 옷으로 덮었다. 핸드폰도 뒤집어 놓았다.
반사되는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
새벽 3시쯤, 거실에서 소리가 들렸다.
TV 켜지는 소리.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침실 문을 조금 열어 거실을 봤다. TV가 켜져 있었다. 플러그를 뽑아뒀는데.
화면에는 침실이 비쳤다.
내 침실.
화면 속에서 누군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였다. 자고 있는 모습이었다. 평화롭게.
그런데 화면 속 침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누군가 들어왔다. 그림자였다. 사람 형태의. 침대에 다가갔다. 자고 있는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침실 문을 완전히 열고 거실로 나갔다.
TV 화면을 봤다.
화면 속 그림자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봤다. 화면 밖의 나를.
그리고 화면이 꺼졌다.
저절로.
거실이 다시 어두워졌다. 가로등 불빛만 희미하게 들어왔다. 나는 TV 앞에 서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플러그를 확인했다. 여전히 뽑혀 있었다.
다음 날, 회사에 가지 않았다. 병가를 냈다.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커튼을 쳤다. 불도 켜지 않았다.
핸드폰이 울렸다. 김 대리였다. 받지 않았다. 문자가 왔다. "괜찮으세요?" 답장하지 않았다.
오후쯤, 배가 고파 부엌으로 나갔다. 라면을 끓였다. 먹으면서 TV를 봤다. 플러그는 뽑혀 있었다. 화면은 검었다.
내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 식탁에 앉아 라면을 먹는 모습. 평범했다.
라면을 다 먹고 설거지를 했다. 다시 침실로 들어가려는데, TV 화면이 신경 쓰였다.
돌아봤다.
화면 속에 누군가 서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
나였다.
화면 속 나는 TV를 보고 있었다.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자꾸 도망쳐?"
이번엔 소리가 들렸다.
희미하게, 하지만 분명히.
나는 비명을 질렀다.
TV를 향해 달려가 주먹으로 화면을 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손에서 피가 났다. 화면이 금이 갔다. 하지만 완전히 깨지지 않았다.
금 간 화면 너머로 그 모습이 여전히 보였다.
웃고 있었다.
나처럼 생긴 그것이.
나는 TV를 들어 창문 쪽으로 던졌다. 창문이 깨졌다. TV가 밖으로 떨어졌다. 5층 아파트. 아래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창문으로 달려가 아래를 봤다. TV가 산산조각 나 있었다. 화면은 완전히 박살 났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저녁이 되었다. 나는 깨진 창문에 임시로 비닐을 붙였다. 손의 상처에 밴드를 붙였다. 거실을 치웠다. 유리 조각을 주웠다.
배가 고팠다. 냉장고를 열어 뭔가 찾았다. 계란이 있었다. 계란후라이를 만들었다. 밥을 데웠다.
식탁에 앉아 먹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받지 않았다.
다시 울렸다.
같은 번호.
나는 받았다.
"여보세요?"
대답이 없었다.
"여보세요?"
잡음만 들렸다. 지직거리는 소리. TV 채널 없을 때 나는 그런 소리.
그러다 누군가 말했다.
"왜 나를 버렸어?"
내 목소리였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던졌다.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같은 번호.
받지 않았다.
벨소리가 멈췄다. 잠시 조용했다.
그러다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저절로.
화면에 뭔가 나타났다.
영상이었다.
내 거실이었다.
지금, 실시간으로.
화면 속에 내가 보였다. 식탁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는 내 모습.
나는 핸드폰을 뒤집었다. 화면이 보이지 않게.
하지만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에서.
"왜 안 봐?"
나는 핸드폰을 집어 바닥에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화면이 깨졌다. 하지만 소리는 계속 났다.
"왜 안 봐?"
"왜 안 봐?"
"왜 안 봐?"
나는 핸드폰을 부엌 싱크대에 넣고 물을 틀었다. 물이 핸드폰을 덮었다. 소리가 잦아들었다.
멈췄다.
나는 싱크대에 기대 숨을 몰아쉬었다.
밤이 깊었다. 나는 침실로 가지 않았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불을 다 켰다. 환하게.
창문에 붙인 비닐이 바람에 흔들렸다. 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파에 앉아 벽을 봤다. TV가 있던 자리. 이제 빈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 빈 공간이 자꾸 신경 쓰였다.
마치 뭔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여전히 빈 공간이었다.
하지만 뭔가 느껴졌다.
시선.
나는 벽을 계속 봤다. 빈 공간을. 그 공간에서 뭔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에 다가갔다. 손을 뻗어 벽을 만졌다. 차가운 벽지였다.
하지만 벽지 너머에서 뭔가 느껴졌다.
손바닥.
누군가 반대편에서 벽을 만지고 있는 것처럼.
나는 손을 떼었다. 뒤로 물러났다.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가늘게, 천천히.
금이 퍼져나갔다. 거미줄처럼. 벽지가 갈라졌다. 그 틈 사이로 뭔가 보였다.
검은색.
화면 같은.
금이 더 넓어졌다. 벽지가 떨어져 나갔다. 그 아래에 화면이 있었다.
TV 화면.
벽 안에.
화면 속에 누군가 있었다.
나였다.
소파에 앉아 있는 나.
화면 속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화면 밖의 나를.
그리고 말했다.
"이제 알겠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 속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면에 다가왔다. 가까이.
"여기가 진짜야."
화면이 더 넓어졌다. 벽 전체가 화면이 되었다. 거실 전체가.
나는 주변을 봤다. 모든 벽이 화면이었다. 천장도. 바닥도.
화면 속에 무수히 많은 내가 보였다.
전부 나를 보고 있었다.
"넌 누구야?"
내가 물었다.
모든 화면 속 나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시청자."
지금 나는 소파에 앉아 있다.
TV를 보고 있다.
새로 산 TV다. 어제 배송됐다. 55인치. 화질이 좋다.
화면에는 내가 나온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내 모습.
화면 속 나도 TV를 보고 있다.
그 화면 속에도 내가 있다.
TV를 보고 있는.
끝없이.
나는 리모컨을 든다. 전원 버튼을 누른다.
화면이 꺼진다.
검은 화면에 내 모습이 비친다.
그리고 그 모습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나를 향해.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화면 속 나는 입을 연다.
"오늘도 잘 봤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내일도 TV를 켤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볼 것이다.
화면 속에서.
시청하고 있는 나를.
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