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형태
샤워기를 틀었을 때는 평범했다.
뜨거운 물줄기가 어깨를 타고 흘렀고, 하루의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병원에서 돌아온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의사는 '경과가 좋다'고 했다. 6개월간의 치료가 끝났고, 이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고.
그런데.
물줄기가 미묘하게 비껴가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수압 문제라고 생각했다. 샤워기 각도를 조절했다. 하지만 물은 여전히 내 피부에 제대로 닿지 않았다. 마치 투명한 막이 나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물방울들이 내 몸 표면 몇 센티미터 앞에서 방향을 틀었다.
샤워기를 껐다 다시 켰다.
이번에는 확실했다. 물줄기가 내 어깨를 '피해서' 흘렀다. 정확히 내 윤곽을 따라 휘어지면서.
심장이 빨라졌다. 손을 뻗어 물줄기에 집어넣었다. 물은 손바닥 직전에서 갈라졌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한 방울도 내 피부에 닿지 않았다.
"뭐야..."
바닥을 내려다봤다.
배수구로 흘러가야 할 물이 고여 있었다. 아니, '고여 있다'는 표현이 정확하지 않았다. 물이 배수구를 피해서 모이고 있었다. 그것도 특정한 형태로.
사람 모양이었다.
누워 있는 사람의 윤곽. 머리, 팔, 다리. 내 크기와 비슷했다. 물은 계속 흘러내렸지만 그 형태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선명해졌다.
나는 샤워기를 껐다.
물 공급이 끊겼지만 바닥의 형태는 그대로였다. 고인 물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구부러졌다. 머리가 약간 돌아갔다.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뒤로 물러섰다. 등이 차가운 타일에 닿았다. 물 형태는 계속 움직였다. 일어서려는 것처럼 보였다.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상체를 천천히 들어 올리고.
욕실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 한참을 숨을 골랐다. 미친 것 같았다. 치료 부작용일까. 약물 때문일까. 아니면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환각.
휴대폰을 들었다. 병원 응급실 번호를 찾았다. 하지만 전화를 걸지는 못했다.
병원.
다시 병원에 가면 또 검사를 받아야 한다. CT, MRI, 혈액검사. 입원할 수도 있다. 6개월간 쌓인 병원비가 아직 다 갚아지지도 않았는데.
아니야. 그냥 피곤한 거야.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다. 물을 한 잔 마시고 잠을 자면 괜찮아질 거라고.
부엌으로 갔다. 싱크대 수도꼭지를 틀었다.
물이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물이 나왔지만 컵에 담기지 않았다. 수도꼭지에서 쏟아진 물줄기가 컵 테두리에서 갈라지며 싱크대로 흘러내렸다. 컵을 이리저리 움직여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물이 나를 피했다.
컵을 내려놓고 손으로 직접 받아보려 했다. 물은 손바닥 위를 그냥 지나쳐 흘렀다. 피부에 닿지 않았다. 젖지 않았다.
수도를 잠갔다.
싱크대 바닥에 물이 고였다. 욕실에서처럼. 이번에는 더 빨랐다. 물이 순식간에 사람 형태를 만들었다. 작았다. 싱크대 크기에 맞춰진 축소판 같았지만, 형태는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움직였다.
물로 된 손이 싱크대 가장자리를 잡았다. 몸을 일으키려는 동작. 나는 뒤로 물러서며 거실로 돌아왔다.
창문 밖을 봤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샤워하기 전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확실하다. 병원에서 돌아올 때 하늘은 맑았다.
빗소리가 점점 커졌다.
창문에 빗물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빗물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중력을 따라 아래로 흐르는 게 아니라, 특정한 패턴을 그리며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 유리 반대편에서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는 것처럼.
아니, 글씨가 아니었다.
얼굴이었다.
빗물이 창문 표면에서 사람 얼굴 형태를 만들었다. 눈, 코, 입. 희미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병원에서 온 문자였다.
"다음 주 화요일 오전 10시 외래 진료 예약이 확정되었습니다. 미수납 진료비 정산 후 진료가 가능합니다. 현재 미수납액: 2,847,000원."
손이 떨렸다. 280만 원. 아직도 그만큼이나 남았다.
다시 문자가 왔다.
"진료비 장기 미납 시 신용등급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분할 납부 상담을 원하시면 원무과로 연락 바랍니다."
창밖의 빗물 얼굴이 입을 벌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내야 해.'
뒤로 물러섰다. 소파 뒤에 부딪혔다.
부엌에서 소리가 났다. 물 흐르는 소리. 싱크대 수도를 분명히 잠갔는데. 욕실에서도 소리가 들렸다. 샤워기 물소리.
복도로 나갔다. 현관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는 순간, 문 틈새로 물이 스며들어왔다.
복도 바닥이 물에 잠겨 있었다. 아파트 복도 전체가. 하지만 이상했다. 물은 고여 있지 않고 흘러가지도 않았다. 그냥 바닥 위에 얇게 퍼져 있었다. 마치 거울처럼.
그 물 표면에 비친 것은 천장이 아니었다.
사람들이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물속에 누워 있었다. 아니, 물이 그들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숨을 쉬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그들의 가슴에는 모두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물로 된 숫자. 계속 변하는 숫자.
"3,250,000"
"1,890,000"
"5,470,000"
빚이었다.
나는 내 가슴을 내려다봤다. 젖지 않은 셔츠 위에, 물로 된 숫자가 떠올랐다.
"2,847,000"
문을 닫았다. 등을 문에 기댔다. 숨이 가빠졌다.
휴대폰이 또 울렸다.
이번에는 전화였다. 병원 원무과.
받지 않았다. 전화는 끊어졌다가 다시 걸려왔다.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째에 받았다.
"여보세요, 환자분?"
목소리는 친절했다. 너무 친절했다.
"네..."
"진료비 관련해서 연락드렸는데요. 현재 미납액이 280만 원 정도 되시는데, 분할 납부 계획 세워드릴까요?"
"저, 지금은..."
"아, 그리고요." 목소리 톤이 약간 낮아졌다. "환자분 다음 주 검사 일정이 잡혀 있는데, 미납금 정리 안 되시면 검사 진행이 어려울 수 있어요."
"검사요? 무슨 검사요? 치료 끝났다고 했잖아요."
"추적 검사요. 재발 여부 확인. 필수입니다. 안 받으시면..."
전화기 너머로 물소리가 들렸다.
"안 받으시면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무슨 문제요?"
대답이 없었다. 물소리만 계속 들렸다. 점점 커졌다.
전화를 끊었다.
욕실 문 틈새로 물이 새어 나왔다. 부엌 쪽에서도 물이 흘러나왔다. 거실 바닥에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소파 위로 올라갔다. 물은 계속 차올랐다. 빨랐다. 발목, 종아리, 무릎.
물속에서 형태들이 일어섰다.
사람들이었다. 물로 된 사람들. 복도에서 봤던 그들. 숫자를 가슴에 새긴 채 천천히 걸어왔다. 나를 향해.
"물러나!"
소리쳤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물이 허리까지 찼다.
창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창문 밖에도 물이 있었다. 빗물이 아니었다. 건물 전체가 물에 잠긴 것처럼, 창문 밖은 온통 물이었다.
그 물속에도 사람들이 있었다.
수백 명. 수천 명. 모두 떠다니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뜬 채로. 가슴의 숫자만 계속 변했다.
물이 가슴까지 찼다.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물이 목까지 차올랐다. 턱, 입, 코.
마지막 순간, 물속에서 내 가슴의 숫자가 변하는 것을 봤다.
"2,847,000"에서 "2,847,001"로.
그리고 계속 올라갔다.
매 초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병원 침대였다.
천장의 형광등이 눈부셨다. 팔에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다. 링거 줄을 따라 투명한 액체가 떨어지고 있었다.
간호사가 들어왔다.
"깨어나셨네요. 많이 놀라셨죠?"
"여기가... 어디죠?"
"응급실이요. 집에서 쓰러지신 거 발견돼서 실려 오셨어요."
"쓰러졌다고요?"
"네. 탈수 증세가 심하셨어요. 물을 전혀 안 드신 것 같던데."
링거 봉지를 올려다봤다. 투명한 물. 내 혈관으로 들어가고 있는 물.
"걱정 마세요. 며칠만 입원하시면 괜찮아질 거예요."
간호사가 나갔다.
링거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일정한 간격으로.
팔의 링거 바늘 주변 피부를 봤다. 물이 혈관을 타고 올라가는 게 보였다. 피부 아래로. 투명한 선이 팔을 따라, 어깨로, 목으로 올라갔다.
가슴이 무거웠다.
셔츠를 걷어 올렸다.
숫자가 있었다.
물로 된 숫자.
"3,124,000"
응급실 사용료, 링거 비용, 입원료가 추가된 것이었다.
숫자 아래로 작은 글씨가 떠올랐다.
'매일 갱신됩니다.'
창밖을 봤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물이 창문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번에는 글자를 만들었다.
'퇴원하셔도 계속됩니다.'
링거 물이 계속 떨어졌다.
똑.
똑.
똑.
오늘도 물을 마셔야 한다.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
하지만 마실 때마다 물은 내 몸을 피해 흐르고, 바닥에 떨어져 형태를 만들고, 그 형태는 천천히 일어선다.
그리고 가슴의 숫자는 계속 올라간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높다.
내일은 더 높을 것이다.
물소리가 들린다.
복도에서, 천장에서, 벽 속에서.
물이 나를 찾아온다.
매일.